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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y cinema/sound for visuals

다시 보고 듣기: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aka 바람의 나우시카, Kaze No Tani No Nausicaa, Nausicaä of the Valley of the Winds, Nausicaa


몇년만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봤다. 1984년작인 이 작품을 다시 보고 든 생각은 "역시 대단하다" 였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내가 지브리의 스타일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정서적인 면에서, 감성적인 면에서)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주장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장황하게 퍼지는 생각들은 나중에 정리하기로 했다. 각설하고, 이번 감상의 포인트는 음악.


오프닝

우선 이 애니메이션은 바람의 계곡에 사는 공주 나우시카가 토르메니아와 페지테, 두 나라와의 충돌 속에서 황폐해진 지구를 구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작품은 만들어진지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봐도 비주얼은 물론 그 내용에 있어서 유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의 생활을 제한하는 오염된 자연, 그 자연을 극복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자고 이야기하는 나우시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의 OST는 꽤 오랫동안 정말로 여러번 들었었는데, 이번 감상에서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음악적인 면에서 (꽤) 유럽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북미 쪽보다는 유럽에서 먼저 인기를 얻었던 게 이해되었다고 하면 오버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 생각해봄 직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유럽풍/유럽지향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 이유는 작품들 속의 공간적인 배경이 어느 나라인지 모호하다거나 <빨간머리 앤>이나 <루팡 3세>, <붉은 돼지> 처럼 직간접적으로 유럽을 묘사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들이었다. 그런데, <나우시카>를 다시 보면서 비주얼이나 내용적인 측면 이외에도 음악도 한 몫 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비교적 초창기 작품이다.)

먼저 나우시카가 부해에서 활동할 때 나오는 음악들을 듣다 보면 그 생소할 정도로 창의적인 (부해의) 배경 디자인과 더불어 르네 랄루 (René Laloux) 감독의 <판타스틱 플래닛> (La Planète Sauvage, 1973년)이 떠오른다. <판타스틱 플래닛>은 문명과 미디어, 권력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아트락 성향이 강한 스코어와 함께 표현하고 있는데, 친환경적인 메시지, 인간의 이기적인 문명비판의 내용을 담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역시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을 상징하는 부해가 등장하는 씬마다 쓰인 기존의 히사이시 조의 음악적 특징들과는 굉장히 거리가 있는 편곡 - 적극적인 전자악기와 키보드 사운드를 활용하는데 이는 마치 60-70년대의 아트락 성향의 곡들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판타스틱 플레닛>을 1981년에 보고 비판한 적이 있으니 어느 방향으로든 이 작품에 큰 영향 및 자극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트랙 1: 風の谷のナウシカ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트랙 2: 王蟲の暴走 (오무의 폭주)
트랙 3: 風の谷 (바람의 계곡)
트랙 4: 蟲愛ずる姬 (곤충을 좋아하는 공주)
트랙 7: 王蟲との交流 (오무와의 교류)
트랙 8: 腐海にて (부해 안에서)


또한 바람 계곡을 묘사할 때 나오는 스트링과 혼 위주로 오케스트레이션 편곡된 스코어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판타지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진 히사이시 조 특유의 멜로디가 중간 중간 출현한다는 점만 빼고는 여느 판타지물에 쓰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분위기를 표현해내고 있다.

트랙 5: クシャナの侵略 (쿠샤나의 침략)
트랙 13: 鳥の人 (새사람) (엔딩곡이지만 곡의 초반부의 진행은 영화 중반에 마을을 묘사할 때도 쓰임)

그 밖에 미야자키가 지상과 하늘에서 활동할 때 나오는 음악이라든지 전투의 상황에 사용된 음악들은 이 작품이 지금은 익숙한 히사이시 조의 사운드트랙의 초기버전임을 깨닫게 해준다. 현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세련된 편곡 (풀 오케스트레이션)과 믹싱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사운드트랙과 달리 간략한 악기 구성으로 이루어진 곡이나 관현악 편곡들, 멜로디가 강조되지 않은 진행의 곡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요즘 믹싱의 특징인 매끄럽고 부드러운 면이 상대적으로 적어 음악이 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효과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음악 믹싱의 특징이기도 하다.)

트랙 6: 戰鬪 (전투)
트랙 9: ペジテの全滅 (페지테의 전멸)
트랙 10: メ-ヴェとコルペットの戰い (메베와 콜벳의 싸움)

하지만 음악 말고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체적으로 조금 투박한 편이다. 당연히 그동안 사운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탓이다. 폭발음을 위주로 한 몇몇 효과음들은 (지금 기준으로) 묵중한 저음이 더 드러나야 효과적인데 선명하게 디자인되지 못했다. 물론 이는 그 동안의 기술발전 때문에 느껴지는 아쉬움일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작품은 20년도 더 된 작품이다.

후반부에 끝내 거신병을 만들어 오무를 공격한 인간들은 오무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해 위기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나우시카의 희생으로 오무는 분노를 가라앉히게 되고 사람들은 평화와 공존의 교훈을 얻게 된다. 나우시카가 쓰러진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 "나우시카 레퀴엠 (ナウシカ レクイエム)"은 초반에 클래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다가 전자악기를 이용하여 멜로디를 입히는데 (후반부의 허밍은 히사이시 조의 4살박이 딸 마이의 목소리이다), 간결하고 서정적인 느낌의 편곡 역시 80년대 전자악기를 주로 사용한 뉴에이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트랙 11: 蘇る巨神兵 (거신병의 부활)
트랙 12: ナウシカ · レクイエム (나우시카 레퀴엠)

시간이 지나면 예전 것들을 잊게 마련이고, 잊지 않는다 해도 자연스럽게 요즘의 취향에 걸쳐서 기억하게 된다는 걸 실감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정점으로 일본색을 되찾기(?) 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작품을 거듭할수록 세련된 편곡과 익숙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히사이시 조의 초기 작품을 다시 본 건 그런 면에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 자, 다음은 <라퓨타>다.


하이라이트


p.s. 정식으로 개봉하기 전, 해적판이 적당한 규모로 떠돌던 때 내가 처음 봤던 제목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였다. 난 지금도 종종 헷갈려서 이 작품을 말할 때면 머릿속으로 한두번 되뇌이며 준비운동을 한 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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