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ovely cinema/talk about movie

A History of Violence - 폭력은 우리 가슴 속에

aka 폭력의 역사

역시 영화를 안 본 분들에겐 스포일러겠지요?

많은 사람들의 좋은 평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이 영화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을 거야' 혹은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울 거야' 라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다는 사실을 영화가 다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비비 꼬이거나 모호한 부분이 거의 없이 전개된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톰이라는 한 사내가 얘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방어적인 폭력을 저지르는데, 그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톰의 전혀 다른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쾌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의 많은 부분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고 그게 이 영화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나 상황, 인물들이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증폭시키는 건 폭력을 강조한 연출인 거고.) 크게 5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많은 이들이 이야기 하듯이 형식적으로 이 영화는 변형된 (현대판) 서부극이다. 이 영화는 여느 카우보이 영화들처럼 평화로운 마을에 찾아온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톰은 화끈하게 이들을 처리하고 일종의 영웅 취급을 받는다. 새롭게 찾아온 킬러들까지 죽여버린 이 영웅은 사실 예전에는 마피아였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 크로넨버그식의 짧지만 굵은 폭력 묘사가 들어있고 이 묘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즉, 예전처럼 영웅을 찬송하는 서부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의 과도한 폭력,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고나 할까?

둘째, 이 영화 속 '폭력의 역사'란 톰 개인의 것이기도 하며 미국의 것이기도 하다. (history라는 단어는 이렇게 중의성을 획득한다.) 주인공 톰은 여느 미국인들이 꿈꾸는 생활(아메리칸 드림)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불사한다. 사실 이 주제는 이제 다른 많은 감독들에 의해 꽤 익숙한 편이다. 이쯤 적고 나니 미국의 역사가 피로 시작했다고 말하는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리고, 사실 이는 미국 뿐만의 것도 아니고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미국은 도대체 왜 전쟁을 벌이는가? 이라크가 미국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라서? 단지 부시라는 꼴통이 우두머리로 있어서? 그렇지 않다. 1960년대에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을 때도, 1970년대에 소련과의 우주전쟁에서 확고한 승기를 잡았을 때도,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어 냉전시대는 추억의 유품이 되어버렸을 때도 미국은 언제나 세계최강국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미국은 20세기에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유일한) 나라 중 하나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상대가 강하건 약하건 간에 언제나 폭력으로 해결해왔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폭력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역사를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단지 부시 때문이라며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


Democracy don't rule the world,
You'd better get that in your head.
This world is ruled by violence
But I guess that's better left unsaid.

Bob Dylan의 노래 Union Sundown 가사 중에서


셋째, 미국 (혹은 폭력성을 지닌 강자)가 행사하는 이 폭력이 결국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사회구성원)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건 바로 톰의 아내 에디로 대표된다. 에디는 톰의 정체가 사실은 예전에 무시무시한 '마피아 조이'였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후에도 그 폭력적인 사람과 계단에서 섹스를 한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요청하여). 그리고, 마지막에 '마피아 조이'가 무언가를 해결하고 (마피아 형인 리치 쿠색을 죽이고) 돌아왔다는 걸 짐작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그를 용인해주는 듯한 침묵을 보여준다.


이는 2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새로 알게된 남편에 대한 무서움 혹은 그가 가진 폭력성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주었고 계속해서 지켜주리라는 믿음. 하나는 폭력에 대한 굴복이고, 또 하나는 폭력에 대한 인정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의 세계 역시 (예전부터)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지금도 제일 강력한 폭력 (미국) 앞에 노력하는 척 하며 그냥 가만히 있거나 (UN의 무기력함) 슬그머니 동의하거나 (파병동의) 대들다가 두드려 맞거나 (아랍쪽 나라들) 하고 있지 않은가.

넷째, 이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 속 의미들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영화의 무대가 기독교의 나라 미국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풍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는 눈 (an eye for an eye)'이라는 말이 구약성서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복수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배상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눈을 다치게 한 자의 눈을 다치게 해야한다는 게 복수와 다른 게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 중의 하나인 미국은 이제껏 다른 나라의 폭력에 배상이 아닌 복수로 대응해 왔다. 아니, 그네들은 오래전부터 폭력에 대한 위협조차도 폭력으로 대응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많은 영화들이 기본적으로 복수(vengeance)라는 개념을 깔고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 우리네 정서는 그저 참고 참고 또 참아서 '한'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게 우리나라와 (기독교 중심의) 서양과 큰 차이 중의 하나 아닌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소송이 끊일날이 없는 곳'이라는 표현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맘 속에 칼을 갈고 갈아 복수하면 독한놈, 독한년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럴 힘조차 없고 빽도 없으면 그냥 참기도 하고, 용서를 해야만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자격을 얻으니 삭히기도 하지만 그네들은 소송을 하고 총을 들고 일어서고 군대를 파병한다.

영화 후반부에 리치 쿠색이 톰 (조이)에게 죽기 전에 "Jesus, Joey" 라고 말하는 거나, 총에 맞은 뒤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듯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것이 왜 그리 웃기던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과장된 캐릭터인 리치 쿠색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톰은 거사를 수행한 후에 물가에 총을 버리고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미 폭력을 저지른 후 그를 적시는 성수 (聖水)가 그의 폭력성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다섯째, 감독이 바라보는 미래 역시 그리 낙관하지 않다. 미국 혹은 현대사회의 폭력성이 톰으로 대변되었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아들 잭으로 대변되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참기만 하던 잭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문제 해결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 놀려대는 친구를 폭력으로 진압한다. 더우기, 아버지 톰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총으로 사람을 죽여서 아버지를 지켜낸다.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폭력성이 '폭력적인 방법을 인정하고 고무시키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미래 역시 이 폭력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솔직히 아들 잭이 친구를 두드려 팰 때 그 정도까지 팰 줄은 몰랐다. 뭐랄까, 관객의 심리적 저지선을 넘어선 연출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보다 더 어린 딸 사라 (더욱 먼 미래)에 대한 판단은 남겨둔 듯 하지만, 그녀는 한동안 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일 것이다. 때가 되면 그녀 역시 스스로 선택을 할 것인데 그녀가 어떻게 성장하리라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예측이 아닌 듯 싶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은 크게 2가지이다. 첫째, 시각적, 구조적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많은 상징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깊게 주제를 드러내보인다는 것 (이런 점에서 데이빗 린치와 완전히 극과 극 아닐까 싶다). 둘째, 이제껏 그가 만들었던 영화들에 쓰였던 소재가 이 영화에서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제까지 존재와 그 존재의 변화, 변이 등이 그 소재들이었다면 이번에는 인간 내부의 욕망 (폭력)이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증식하며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주인공 톰/조이를 연기한 비고 모르텐슨은 대사도 거의 없이 섬세한 표정과 몸짓만으로 지킬박사와 하이드 정도의 내면 연기를 해냈다. 특히 그의 눈빛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를 보여주며 매번 정확하게 영화의 흐름과 일치하며 빛났다. 저 깊은 유황불에 사는 악마를 깨우는 듯한 역할을 한 에드 해리스 역시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의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윌리엄 허트는 전체적으로 과장된 캐릭터 때문에 마지막에 남는 인상이 재밌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 역시 튀지 않고 이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 음악은 여느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작품처럼 <The Brood (1979)>부터 작업해 온 하워드 쇼어가 맡았다. 재밌는 건 그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속에서 들려주는 사운드트랙은 언제나 평상시에 그가 작업하는 다른 감독 작품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마찬가지다. 사운드도 편곡도 직설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감수성을 자극하지도 않으며 극의 내러티브와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묘하게 부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들의 독특한 분위기는 하워드 쇼어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