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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view & mind

지나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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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광고 전단지를 보고 있는데, TV에서 Tom Hanks 주연의 Cast Away를 틀어준다. 비행기가 추락한 후 노란 고무보트(?) 타고 탈출을 시도하는 (물론 어이없이 실패하지만) 장면,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 Wilson을 만나는 장면이 얼핏 지나간다.

About a Boy에서 Hugh Grant의 말처럼 -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섬처럼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Cast Away의 주인공이 이겨내고 견뎌내야 했던 역경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 여기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느끼기에 이 곳은, 예전에 내가 지내던 환경과 비교하자면 섬과 섬 사이의 거리가 좀 먼 곳인 것 같다.

물론 몇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내 친구들, 아는 사람들이 여기에 없으니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한국 유학생들은 각자 힘들게 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할 수도 있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떠나서 이 곳의 문화가 내가 오랫동안 겪었던 문화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내 이 곳에서의 언어가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그 색깔이 옅어지는 것들이 차츰차츰 생기겠지.

재밌는 건 - 며칠 전에 문득 든 생각이 영화 Cast Away의 주인공의 행보와 비슷하게 생각된다는 것.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고, 새로운 생각들을 하며 - 극복하거나 인정하면서, 맞서 싸우거나 함께 흘러가면서, 두고 온 것들을 그리워 하거나 새로 생겨난 것들에 애착을 느끼면서 - 지내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

다시 예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예전 같을 수 없다'는 문장은 왠지 '예전이 더 좋다'는 어감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서라도 어쨌든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 여러가지 사정들이 더 좋아질지도 모르지. 소중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더욱 노력하며 지낼 수도 있고, 시간을 지내며 달라진 스스로가 더욱 강해져 있을 수도 있고...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왔을 때 소중한 것들 중 - 예전과 같은 것 혹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들이 있다는 것. 그건,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은 소중한 것들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다가 반짝거리며 손 끝에 남는 몇 알의 모래알처럼 - 그렇게 남게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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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잠깐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다가 문득 한국에 두고 온 박스가 생각났다. '아, 거기에 영어책들 있는데... 거기 읽을 만한 책들이 좀 있을텐데...' 하는 생각. '살다보면 언젠간, 어딘가에 쓸모가 있겠지' 하며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발상으로 무언가를 남겨둔 것들은 대부분 쓰레기가 된다.

혼자 산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이제서야 간신히 느끼는 건 (아직도 실천으로 잘 옮기진 못하지만), '이 곳이 내 집이야, 내 고향이야.' 라고 생각되는 곳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쌓아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다.

물론 언젠가 쓸모가 있는 것들도 있다. 매번 집을 옮길 때마다 멀티탭을 사는 건 바보 같은 짓이고, 매번 새로 밥공기를 사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고, 매번 옷장을 새로 사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새로운 필요 때문에 사는 건 몰라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좀 아깝게 생각되도 다 버려도 된다. 물론 쓰레기통에다 쳐박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줘도 되고, 아는 사람들끼리 나누면 되는 것이다.

혹 멀리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니면 새로운 곳에 갔을 때 (그런 매우 일상적이고, 자주 사용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게 없어서 - 불편해서 죽을 것 같거나, 그거 없이 못 산다거나 하는 것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면 지니고 있었어야 당연한 거지,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거지 - 아니, 적어도 이건 꼭 보관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메모를 해두거나 했어야지.

살면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물건들이 가치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두렵다. 그걸 감당해야 하는 내 자신이 두렵고, 그것들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두렵고, 소중한 것들이 늘어날수록 내가 알고 있던 소중함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아 두렵다. 내가 사라지는 것도 두렵지만, 내가 무의미한 것들을 남기고 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입으로는 자유롭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매일 수많은 것들에 묶여 있는 나를 본다. 나는 정말 자유롭고 싶은가.


11 July 2004, Clemton Park NSW Australi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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