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24' 에 대한 소문은 익히 잘 들어 알고 있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24편짜리 한 시즌이 끝날 때까지 쉴 새 없이 계속 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거나, 지금이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인지 팔머 (데이빗 팔머, David Palmer) 대통령 재임 중인지 헷갈린다는 이야기나, 정말 XX맞게 바쁜 잭 바우어 (Jack Bauer)가 불쌍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다, 어쩌다 시즌 4의 몇몇 애피소드들을 '띄엄띄엄' 보게 되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연속극처럼 주인공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하면서 긴박하게 흘러가는 것이 꽤 재밌다고 느꼈다. 미국의 여느 액션 드라마들처럼 한회가 끝날 때 다음회의 내용을 살짝 흘려 감질맛 나게 하는 구성도 한 몫 했다고 본다.
어쨌거나 시즌 1부터 시즌 4까지 짧은 시간에 모두 보게 되었는데, 시리즈를 보면 볼수록 기분이 영 찜찜한 것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몇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참고로, 드라마 '24'의 전 시즌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다. (음향, 편집, 캐릭터 등) 그러나, 재밌게 본 것과 찜찜한 느낌이 드는 건 별개라고 생각한다.
아래의 내용은 드라마 '24'의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무서운 분들은 보지 마세요. :)
1테러 앞에 장사없다.
이 드라마는 대놓고 이야기한다 - "지금 나라가 아주 위험한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데, 절차는 필요에 따라 무시될 수 있다"고. 적지 않은 순간에서 "개인의 자유" 따위도 국가의 위기 앞에서는 무시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잭과 토니 (토니 알메이다, Tony Almeida) 등의 주인공들은 공공연하게 "절차가 그리 중요하느냐, 나보다 결과를 더 잘내는 사람은 없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중요시 여긴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개인의 자유와 절차와 방법을 논하는 건 쓸모없다니... 거참 불편하다.
2상황을 궁지로 모는 저돌적 인간형
위처럼 이 국가의 위급한 위기상황을 주로 처리하는 잭 바우어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 가족도 팽개치고, 조직 내의 사람들을 의심하고, 자신의 판단을 100% 신뢰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질주한다. 잭 바우어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 방법 말고는 없다"며 촉박한 선택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은 결국 여기에 춤을 추게 된다.
애국심이 투철하다 못해 국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이 사내는 다른 편에서 보면 자신만의 신념에 빠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과 불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다른 대안들을 없애버리는 꼴통에 다름 아니다.
3정치는 그놈이 그놈이다?
분명히 데이빗 팔머는 민주당쪽 후보 (후에 대통령이 된다)를 상징한다. (공화당이 미치지 않고서야 흑인 후보를 내지 않겠지.) 또한 최대한 절차와 정직를 중요시 여기며 정치활동을 하던 민주당쪽 후보가 회를 거듭할수록 시즌을 거듭할수록 점점 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한다는 현실을 깨닫는 인물이 되어간다.
시즌 4에서는 공화당쪽(인듯한) 사람이 대통령권을 행사하고, 그는 리더쉽이 매우 부족하고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이 테러로 희생되고 난 후에 그의 역할을 행사하는 부통령일 뿐이다. (물론 직책은 정식으로 위임된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 안가리고, 흙탕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적인 지도력을 주는 사람은 민주당쪽 순수했던 전직 대통령 팔머다.
민주당 너네도 공화당이랑 다를바 없다... 결국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다 그런 짓을 해야한다... 너도 달라지는 걸 봐라... 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4소수자들에 대한 시선
뭐 굳이 이 드라마 뿐이겠느냐마는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90% 이상이 아랍계열 사람들이다. 시즌 4까지 이를 때까지 전직 영국 첩보부 소속이었던 사람 빼고는 모두 아랍계열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로 나온다. 게다가 이들은 미국 사회에 거대한 조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긴다.
또한 여성들에 대한 시선도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 긍정적이지 않는 캐릭터로 권력을 위해 뭐든지 하는 데이빗 팔머의 부인 쉐리 팔머 (Sherry Palmer), 시즌 1에서부터 배신을 일삼는 스파이 니나 마이어스 (Nina Myers), 규정에 철저하지만 잭에게만은 모든 게 예외인 괴짜 엔지니어 클로이 (클로이 오브라이언, Chloe O'Brain) 등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그만큼 많은 것도 아니다. 진행되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적인 인물로 멈춰있다.
5방송사는 폭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는 방송사는 폭스사. 조지 부시와 가까운 폭스사에서 이러한 내용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음을 의심하는 건 그야말로 앞뒤가 바뀐 추측이겠지만 기분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미국은 위험하다니깐?", "부시 행정부가 강력 대응하는 건 테러 때문이라니깐?" 뭐 이런 뉘앙스로 느껴진다는 것 - 이건 내 개인적인 공상이겠지...?!
그리고...
시즌 1의 처음 몇편의 에피소드를 보기 시작하며 "오- 흑인 대통령 설정이네?", "오- 잭 바우어의 뛰어난 판단력이란!" 뭐 이런 식으로 봤던 것들이 시즌이 거듭되면서 위에 열거한 부정적인 면들이 점점 더 보이기 시작했다. 뭐랄까, 오히려 위의 생각들을 숨기기 위한 절묘한 트릭처럼 느껴졌다랄까?
게다가 시즌이 거듭될수록 그 위기상황이라는 것들이 점점 덜 위험한 것들로 구성된다고 느껴지고 (개인적인 느낌이다), 급기야 시즌 4의 내용은 부실하게 느껴지기까지 시작했다. (이제껏 일어났던 이야기를 "previous 24..." 말고도 대통령에게 브리핑, 본부장에게 브리핑 등 하는 장면을 넣어서 시간 때우는 등)
그렇다면, 드라마 24는 폭스의 계몽 시리즈일까, 현재 미국 행정부의 행동 정당화 프로젝트일까? 아니면 미국인들의 현재 심리상태를 이용해 시청율을 따먹는 지극히 상업적인 결과물일까? 그게 그거인가?